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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살아보기

시드니, 써리힐(Surry Hill) 은 내게 고향이었다.

언제부턴가 아침에 커피를 찾는 내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오래된 습관에서 비롯된 추억 같은 것이다. 새벽 5시, 눈을 뜨자마자 세수만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한다. 시드니 도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써리힐(Surry Hill) 에 위치한 호주카페와 일식당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있었던 지라 이 곳으로 가는 매일 아침 출근길은 정말인지 나의 호주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하루의 고된 일상들이 너무 힘이 들어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매일 걷던 이 길은 내겐 하나의 휴식같은 것이었다. 문 앞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쌀쌀한 공기에 옷깃을 여미지만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비가 오는 날은 잔잔한 음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예상되는 날은 경쾌한 음악을 선곡하며 언덕으로 오르는 길 초입에 서있다보면 운동을 하며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사람들 혹은 나처럼 이른 아침 출근으로 커피 한 잔 손에 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눈이 마주치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속에 내가 서있다는 사실은 피곤하고 외로운 일상에서의 일어나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이 길을 걷는 것이 참 좋았다.


언덕길을 오르며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리며 느리게 걷다 보면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읽는 사람도 보이고,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한번에 들이키고 재빨리 그자리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매일 같은 길을 지나다보니 이젠 익숙한 가게들의 직원들과의 인사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끝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 중 하나는 써리힐(Surry Hill) 이라는 지명에 걸맞는 언덕을 오르는 일이다. 일년을 넘게 다닌 길인데도 숨이 차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Crown Street , Surry Hill


내가 일했던 카페는 중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대로변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곳이었다. 언덕을 오르느라 찬 숨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열고 무거운 간판과 의자들을 바깥에 내 놓으면 출근한지 30분 만에 피곤함이 몰려온다. 카페 맞은 편 도로 이층 건물에 사는 단골 아저씨는 매일 아침 내가 출근 하기를 기다리며 창문 밖으로 보고 계시다가 얼른 내려와 그런 나를 도와 마지막 남은 탁자 들을 옮겨주시며 커피를 주문했다. 사실 다 지나서 하는 애기지만 일부러 아저씨가 내려 오는 속도에 맞춰 힘이 드는 척 낑낑대고 있었던 적도 많았다. 


작은 Cafe' 와 상점들이 즐비한 Surry Hill 풍경


진한 커피 한 잔을 드리고 본격적인 가게 정리를 하고 옆에 있는 작은 슈퍼에 가서 오늘 발행된 신문 2부를 사가지고 돌아오면 그제서야 내게도 아주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얼음을 잔뜩 갈아 넣은 롱블랙 한잔을 마시며 앞치마를 메고 카운터에 서서 써리힐의 아침을 맞이하는 그 시간이 짧았지만 소중했다. 신기하게도 매일 그 시간이 되면 Birdy 의 People help the people 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손에 꼽을 정도의 날을 빼곤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노래 같은 장소에 내가 서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니 꽤 놀랍다.


내가 일했던 Cossies's Cafe


20여분의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오후 3시가 되면 가게 문을 나선다. 그리고 나서 블럭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일식당으로 또 다시 출근을 한다. 이 곳의 사장님은 한국 분이시고 같이 일하는 사람도 다들 한국사람이어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4년간의 호주 생활 중 거의 2년 가까이를 일했던 곳이라 오전 내내 받은 스트레스를 이 곳에서 풀며 힘든 생활을 견딘 곳 중 한 곳이다. 오전 10시부터 문을 여는 이 곳은 3시가 되면 브레이크 타임(3시-5시)을 갖는다. 직원들이 점심도 먹고 쉬기도 하는 이 시간부터 밤 10시까지가 보통 내가 근무하는 시간이었다. 


학교 가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같이 이 곳에서 일을 하며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단골 손님들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일이었다. 이 곳 호주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한다. 2년을 넘게 봐왔으니 이름은 물론 하는 일이나 가족관계 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쌓아온 인연들이 내가 호주 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한 아주 큰 선물 같은 것이었다. 


호주에서 취업하기 위한 이력서를 직접 손봐주기도 하고, 쉬는 날이면 함께 놀러가거나 식사를 하기도 했으며, 생일이면 선물도 챙겨주고 가끔은 꽃도 받았었다. 그 때 친분을 쌓은 사람들과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고 그 중 한 친구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참 소중했다. 또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 일한 사람들과의 생활도 나에게는 큰 위로 였고 힘이 되는 시간들이었다. 마음이 안맞아 티격거리기도 하고 섭섭한 일도 있었지만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늘 함께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외로웠던 나의 생활이 조금은 견딜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길


하루에도 몇 번씩 걸어다니던 길을 떠올리면 문득 그리움에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 곳이 아름다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한국에 와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으로 다시 호주로 갔던 내게 사람들은 '왜 하필 다시 그 곳으로 가냐' 는 질문을 많이 했었다. 호주에서 4년간의 추억들과 생활들을 이젠 혼자가 아닌 둘이서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고, 생활에 치여 일만 하고 살았던 그 곳에 여유를 찾아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걷던 길을 남편과 걸으며 소소한 일들을 공유하고 느끼면서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이 곳에 대한 추억을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어 참 좋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이 곳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겠지만, 나의 아름다웠던 20대의 끝자락에서 행복했던 기억들은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Good Bye, Surry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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