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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친 여행을 꿈꾼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Charles Carroll. 190cm 키에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를 처음 만난건 터키, 이스탄불 구시가지에 위치한 작은 호스텔이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건물 옥상에서 테이블 한 가득 종이를 펼쳐놓고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그. 아시아인이 전혀 없던 호스텔에서 홀로 머쓱해 하고 있던 내게 말을 걸어주기 전까지 그는 그저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된 외국인에 불과했다.  


처음 숙소를 에약할 때 한국사람이 거의 머물지 않는 곳을 선택하고, 1인실이 아닌 6인실의 침대 하나를 예약하면서 나 홀로 배낭여행 이라는 타이틀에 맞는 어떤 도전적인 시도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다국적 여행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해맑게 웃고 있는 여러 여행자들의 사진을 많이 접한 나로서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 어떤 환상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어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통하는 만국공통어인 바디랭귀지가 있으니 의사소통에 대한 두려움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숙소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사람이 이토록 간사해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한인민박이나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곳에 머물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작은 동양인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듯 곁을 지나치고, 숙소 직원이 안내해 준 방에 있던 사람들은 내가 짐을 풀고 침대를 정리하는 내내 각자 책을 보거나 게임 따위를 하며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래, 조금 손해보더라도 내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야'



열 시간이 넘는 비행에 많이 긴장한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잠을 좀 자고 싶었지만 방안에 있던 남자들이 신경쓰여 가이드 북을 들고 옥상에 마련되어 있는 휴게공간으로 올라갔다. 어디를 먼저 가야하나?, 혼자 잘 다닐 수 있을까?,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라는 걱정을 하며 어색하게 그저 책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이 웃고 얘기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한쪽 구석에서 낯설음에 고개만 떨구고 있었던거다. 그런데 그 때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친숙했다. 한 시간째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처음 말을 건내준 그가 내 앞에 앉으며 환하게 웃음지을 때는 무척이나 감격스런 표정으로 눈물이라도 흘릴 지경이었다. 이스탄불에 온지 벌써 5일째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Charles. 내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능숙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유명한 관광지는 어디인지,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지에 대해 늘어놓는다. 아직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 본 내가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함께 나가자며 막무가내로 손을 이끈다. 


아시아의 온갖 물산이 넘나들던 교역의 메카,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은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앞서 소개한 블루모스크와 같이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는 그랜드 바자르. 터키 최대의 재래시장인 이곳은 터키어로 카팔르 차르쉬(Kapali Carsi) 즉, 지붕이 있는 시장이다. 이 곳을 통해 유럽의 부가 전해졌고, 실크로드를 따라온 아시아의 물품도 이 곳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하는데 정말인지 그 크기가 어마무시하다. 전체 면적이 30만 제곱미터에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상점은 5,000개를 헤아린다니 할 말을 잃는다 한 들 그리 놀랍지 않다. 


그랜드 바자르에서는 길을 잃기가 매우 쉽다. 

크기가 크기인만큼 섣불리 들어가 정신을 놓고 있다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길을 헤메일 때가 많다. 한 번 들어가면 같은 출입구로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던 가이드북의 조언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였을까? 나 또한 이곳에서 1시간 가량을 헤메이다 결국 내가 처음 들어갔던곳과 정 반대의 출입구로 나와버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여행이 끝날 무렵 다시 돌아온 이 곳에서 또 한번 도전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도대체 출구가 어디야?



숙소로 돌아오니 어색함과 낯설음은 사라지고 모두가 다 친근하게 느껴진다. 눈이 마추지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그런 내게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들. 마음가짐에 따라 주변의 상황들이 변하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도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며 관심을 보인다.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지친 기색으로 처음 그들과 마주쳤던 순간과 비교해보니,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한껏 상기된 얼굴로 웃는 모습을 하는 내게 말을 걸기가 어쩌면 더 수월했으리라. 하루만 묵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은 3일치 숙박비를 한 번에 계산하며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긴장이 풀어지며 어느새 편하게 잠이 들었다. 아마도 좋은 꿈을 꾸었겠지. 


2시간 쯤 지났을까? 테라스로 올라가니 종이들을 펼쳐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대고 있는 찰스가 보인다. 자세히 다가가 살펴보니 스케치북을 16등분 하여 만든 단어장이다. 간단한 어휘들을 적어놓고 영어로 그 의미와 뜻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150장 정도 되어 보이는 낱말 카드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외우고 있는 그. 영어가 모국어인 네가 왜 굳이 그걸 외우고 있느냐는 장난스런 나의 물음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나는 지금 터키에 있으니까 

예상치 못한 답변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다시 입을 연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여행을 와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나 전통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예의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든. 이 곳에 있는 동안이라도 그 나라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어? 



부끄러웠다. 여행을 떠나 오면서 의사소통에 꼭 필요한 것은 영어라고 생각했고, 터키의 간단한 인사말 정도도 찾아보지 않은 내가 한심했다. 사실 예전에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던 시절 지하철을 타고 가다 길을 물어본 외국인이 무섭고 낯설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질문을 하는 외국인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을 치기 일수였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배우고 왔어야지' 라며 속으로 욕을 퍼붓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이 먼 타국에 와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그 외국인과 다를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게 길을 물어 본 그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말이라도 건넸더라면 나 역시 조금은 더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을까? 나는 문득 창피한 생각이 들어,  털석 앉아 찰스의 단어장을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외우고 또 외우고, 모르거나 궁금한 것들은 그새 친해진 숙소 직원들에게 물어보며 머리속에 단어들이 하나 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흥미가 붙었고,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이토록 신나는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생각컨데, 장작 5시간 동안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단어를 외우다가 음악을 듣고, 풍경과 나른함에 취해 잠깐씩 졸면서 앉아있는게 전부였다. 어쩌면 여행을 하고 인생을 즐기는데 있어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포함해서 말이다. 





 





















어제의 일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닥치지 않는 내일의 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한 껏 여유를 만끽하며 앉아있던 내가 중요했을 뿐. 



ISTANBUL . TURKEY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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