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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산티아고 순례길

<두려움에서 설렘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 생장에 가다.

생 장 피데 포드(Saint Jean Pied De Port)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바욘(Bayonne)의 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 같이 기대감에 찬 모습이었고, 각자 순례길을 걷기 위한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야간 버스를 타고 바욘(Bayonne)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이른 아침이라 표는 금방 구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꼬박 이틀 동안 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배고픔에 시달리며 이 곳까지 왔는데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11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려면 멀리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라 결국 터미널 안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커피 한 잔과 바게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바욘(Bayonne) 터미널


바욘에서 생장 가는 길


모두의 설렘으로 가득 찬 버스 안의 공기 탓이었을까. 피곤했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제 2시간 후면 생장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에 연신 감탄에 찬 쉰 목소리를 낸다. 바욘에서 생장으로 가는 길은 동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좁은 산길을 굽어 달리다가 만나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을들을 보며 '이제 곧 이런 길을 걷게 되겠지'라는 상상과 함께,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로터리가 많고 차 두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을 큰 버스로 달리다 보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다. 새삼 매일 같이 이 길을 운전하는 사람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생 장 피데 포드(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하나같이 같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프랑스 길이 가장 유명하며 이 길의 시작점이 바로 이 곳 생장이다. 모두들 각자의 삶의 무게를 배낭에 담아 걷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생 장 피데 포드(Saint Jean Pied De Port) , 터미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알베르게로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알베르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전용 숙소로 공립과 사립 그리고 기부제 형태로 나뉜다. 공립은 흔히 무니시팔이라고 부르며 하루에 인당 5-10유로 정도로 사립 알베르게보다 저렴하다. 사립 알베르게에 비해 시설이 열악한 경우도 많으나 어떤 곳은 사립보다 더 좋은 환경인 곳도 있다. 사립 알베르게는 하루에 인당 10-20유로로, 공립 알베르게가 꽉 찼거나 조금 더 편안한 시설에서 자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데 우리는 하루라도 편히 자고 싶은 마음에 조금 비싼 가격이지만 사립 알베르게의 2인실을 선택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인 생장에서 처음 묵었던 2인실 사립 알베르게 Auberge du pelerine. 가격은 인당 23유로로 조식이 포함된 가격이다. 


드디어 생장에 도착하다. 


한국을 떠난 지 45시간 만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 곳 생장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다. 약간의 낮잠을 청한 뒤 밖으로 나가 살펴본 생장은 아름다웠다. 마치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듯 4월의 싱그러운 풀내음과 꽃향기, 그리고 두엄냄새가 뒤엉킨 이 곳에서 우리의 여행을 시작한다는 것이 설레었다. 좁은 골목길에 늘어진 알베르게와 멀리 보이는 초원, 그리고 그곳에서 뛰노는 양과 말, 당나귀들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는 4월 초의 생장은 한산했고, 사람들 모두가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례자를 상징하는 동상


잡화점, 색색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품질 좋은 와인을 판매하는 곳 


여유로운 생장의 모습


생장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식당에서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마친 뒤, 거리를 둘러보다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길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국에서도 버스 한 번이면 오갈 수 있는 안양에 살고 있고, 이야기도 잘 통하는 것이 어쩐지 친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내 중심의 레스토랑,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다


수척하지만 행복한 얼굴의 몽군 


드디어 제대로 된 한끼 식사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이분들의 추천으로 계획을 바꿔, 다음날 오리손(Orisson)산장에 머물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례길을 시작한 첫날, 가장 힘들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에 머무는데 오리손 산장은 피레네 산맥 중턱에 위치한 산장이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시기에는 한두 달 전에 이미 예약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지만,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상대적으로 적어 많은 이들이 잠시 쉬고 가는 곳으로 만족하는 곳이다. 


"저희는 따로 예약을 안 했는데, 자리가 있을까요?"

"괜찮을 거예요. 저희도 오늘 도착해서 순례자 사무실에 들려 예약하고 왔어요"

"원래 저희는 이틀 정도 생장에 있다가 출발할 예정이었어요. 피레네 산맥을 넘는 게 힘들다고 해서요"

"오리손 산장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서 피레네 산맥을 이틀에 걸쳐 넘을 수 있는 곳이에요"

"그럼 저희도 예약하고 내일 그곳에서 뵙도록 하죠"


우리의 체력을 믿을 수 없었던 지라, 최대한 가볍게 몸을 추스르고 넘을 예정이었던 피레네 산맥을 이틀에 걸쳐 넘을 수 있다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4월 초, 아직 사람들이 많이 붐비지 않는 순례길이라 도착한 날 바로 오리손 산장을 예약한 우리는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또한 처음부터 비슷한 또래의 부부를 만나 긴장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성벽을 따라 생장을 걷다 


4월의 어느 화창한 날


반나절이면 충분히 생장을 둘러볼 수 있다


길가에 핀 한송이 꽃


순례자 메뉴란 <Menu del Peregrino>


저녁을 일찍 먹고 들어가 쉬기로 한 우리는 순례자 메뉴를 저녁으로 선택했다. 순례자 메뉴는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식당이나,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코스요리로 보통 애피타이저, 메인 메뉴, 디저트와 음료 또는 와인 한 잔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당마다 제공하는 요리는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보통 순례자 메뉴는 10유로 정도. 오후 6시쯤 들어간 식당은 한산했다. 


이 곳에서 먹은 순례자 메뉴는 12유로로 생장의 다른 식당과 가격이 비슷하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아까 길에서 마주쳤던 부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합석을 하고 식사를 시작하는데, 감사하게도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귀한 소주를 물병에 담아 한 잔 가득 따라준다. 프랑스 남부의 생장이라는 어느 작은 마을, 이 곳에서 집 근처에 사는 또래 부부를 만난 것도 신기했지만, 금세 친해져 건배를 하고 술 한잔에 기분이 좋아진 우리의 모습이 참 재미있었다. 각자가 순례길에 오르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이 곳까지 오기 위한 과정들을 나누다 보니 비슷한 점이 많았던 우리. 짧지 않은 여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또 얼마나 간절하게 이 여행을 기다려왔는지. 공감과 이해가 넘쳐나는 여유로운 저녁 식사였다.


애피타이저, 오늘의 수프(Soup)


오늘의 메인 메뉴는 훈제 치킨


이제 다음날이면 드디어 순례길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아직은 두렵기도 하지만 완벽했던 하루의 끝에서 기분 좋은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가득하다. 힘들고 지치는 날도 많겠지만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순간인가. 우리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이 새삼 꿈처럼 느껴진다.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파리 남부의 작은 마을, 생장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우리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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